“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요 14:26~27)
김삼환 목사(경기북·인천지역총연합회장, 여의도순복음김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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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27 10:22관련링크
본문

1. 평안은 가장 가치 있는 것입니다.
평안은 불안이 없는 상태이기에 불안을 없애야 참 평안이 임합니다. 이 불안이란 ‘모든 악한 일들이 현실로 나타나기 전에 숨어있는 모든 가능성’을 말합니다. 그래서 불안이란 일종의 가능성이기 때문에 구체적인 형태나 내용이 없이 막연합니다. 막연하다 할지라도 가능성이란 없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이기에 가능성이 없이는 현실성도 없습니다. 이런 ‘악의 가능성’인 불안을 제거하며 주어지는 것이 평안이기에 이 평안은 실로 우리 삶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입니다.
반면 이 세상의 쾌락 명예 권세 부나 모든 위대한 일들은 항상 죄로 말미암은 것이어서 불안의 가능성을 갖고 있습니다. 즉 불안을 동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안은 이런 불안을 동반하는 그 어떤 위대한 일보다 더 나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축복과 평안을 예리하게 구분해서 축복받기 위함이나 축복 그 자체를 구하기 위해 주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평안을 얻기 위해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축복이란 ‘뭔가 잘 되게 하는 것’인데 평안은 ‘뭔가 잘 안되게 하는 것의 가능성을 없애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뭔가 잘 안되게 하는 하나의 악을 없애는 것이, 하나의 악을 그대로 둔 채 열 가지 선을 얻는 것 보다 더 낫습니다.
즉 평안은 축복보다 더 낫습니다. 우리 삶이 잘 되어야 평안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평안해야 잘 되게 됩니다. 그러므로 축복을 구하는 기도 보다 더 깊고 성숙한 기도는 평안을 달라고 구하는 기도입니다.
(새찬송가 410장 4절) 이 평화를 얻으려고 주 앞으로 나아갈 때 주 예수님 우리에게 이 평화 주시도다 평화, 평화 하나님 주신 선물 그 놀라운 주의 평화 하나님 선물일세.
2.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외적 평안이 아니라 내적인 평안입니다.
사람들은 오직 바깥 환경에서 외적 평안을 찾으려 합니다. 사람들이 평안을 구하지만 얻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권력자들이 평안하고자 하여 자기 힘과 능력으로 적을 제거하려 하고 자신의 미래의 안정을 도모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려고 애를 씁니다.
투자자들은 주식주가의 변동사안을 면밀하게 관찰하며 생업에 종사하는 모든 자 들은 관련 환경을 고치려 하고 개개인은 다른 사람의 평판을 살피며 자신의 일이 얼마나 잘 되는지를 신경 쓰고 앞날에 문제를 가져오는 것들의 모든 가능성을 없애려고 애를 씁니다. 이래서는 인생 끝날 까지 결코 평안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외부 세상은 늘 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바깥세상은 늘 분주복잡하고 요동치는 세상입니다.
고대 스토아 철학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밖으로 나가지 말라. 네 자신 속으로 돌아가라. 사람의 깊은 내면에 진리가 거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우리의 안이 우리의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임을 깨달아 알고 우리의 안이 우리의 바깥세계를 지배한다는 것을 깨달아 안다면 우리는 우리의 눈을 우리의 내부로 즉 우리의 내면의 세계로 향하게 할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바깥은 그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해도 심령의 평안보다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시 46:1-3)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우리 마음 ‘깊은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평안입니다. 우리의 내면에서는 이성의 판단이 지배하고 우리의 내면 보다 더 깊은 내면에는 진리이신 주님이 거하십니다. 이 깊은 내면의 평안은 내면의 이성적인 설명보다 더 깊은 것이어서 왜 평안한지 결국 설명이 될 수 없습니다.
이러한 평안은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투옥된 후 그들이 느낀 평안입니다. 이러한 평안은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하면서도 느낀 참으로 신비한 평안입니다.
(행 7:55, 56)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행 7:59, 60)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당신은 나의 내면보다 더 깊은 내면에 계셨고 나의 가장 높은 곳보다 더 높은 곳에 계셨습니다(고백록Ⅲ, 6,11)”
하나님 아버지의 영이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은 우리 마음 속에 들어와 계시기 때문에 어거스틴의 이러한 주장은 옳습니다.
(요 14: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오늘 본문에도 예수님은 평안을 말씀하시면서 성령을 먼저 언급하셨는데 이는 주님이 주시는 평안이 우리 마음 내면의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평안임을 알게 해 주는 것입니다.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3.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바로 주님이 가지신 그 평안입니다.
이는 우리의 마음이 우리 속에서 우리 스스로 느끼는 평안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이 점에서 기독교는 다른 수양종교들과 다릅니다. 모든 수양종교들도 내면의 평안을 추구하는데 이는 우리의 마음이 우리 속에서 우리 스스로 느끼는 평안을 추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을 수양해야 하고 온갖 덕목을 쌓아야 합니다. 마음의 내적인 평안이 그 덕목의 결과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내면의 평안은 우리 스스로 노력하고 수양해서 얻게 되는 그런 수양종교적인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평안은 다름 아닌 주님의 평안입니다.
(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이 말씀은 ‘주님의 평안’ 즉 내가 스스로 수양하고 덕을 쌓아 얻게 되는 ‘나의 평안’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즉 내 마음이 수양이 덜 되어도 내 마음 속에 온갖 죄악의 파도가 넘실거리고 악이 가득 하다 하더라도 세상의 욕심과 정욕이 넘쳐나고 마음의 수양이 안 되어 있는 상태라 하더라도, 주님이 평안을 주시는 까닭에 주님의 평안이 우리 속에 주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시는 다른 것들과 함께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즉 죄 사함과 용서와 치료와 축복과 영생천국과 함께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리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다른 것입니다.
(새찬송가 408장 1절)
나 어느 곳에 있든지 늘 맘이 편하다 / 주 예수 주신 평안함 늘 충만하도다 / 나의 맘속이 늘 평안해 나의 맘속이 늘 평안해 / 악한 죄 파도가 많으나 맘이 늘 평안해
결론적으로 세상이 주는 평안은 외부 환경으로부터 주어지는 평안이요 나 스스로 수양하고 노력해서 얻는 나의 평안을 말합니다. 이러한 평안은 진정한 평안이 아니라 거짓된 평안이며 불변하고 영원한 평안이 아니라 항상 변하고 일시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그 어떠한 변화도 ‘없음’ 이라는 단어인 ‘평안’이라는 말 자체의 진정한 의미와도 모순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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