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 뼈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으라” (겔 37:1~10)
정정자 목사(서울남부지방회장, 크리스탈순복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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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롭고 편리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과학과 기술은 빠르게 발전하고 있으며, 손안의 작은 기계 하나로 세계의 수많은 정보와 지식을 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과 풍요가 인간의 영혼까지 풍성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다. 물질은 많아졌지만 마음은 공허하고, 관계의 통로는 넓어졌지만 외로움은 깊어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삶의 방향과 의미를 잃고 불안과 염려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교회도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예배는 계속되고 있지만 예배의 감격이 약해지고, 기도는 드리지만 간절함이 사라지며, 신앙생활은 오래 했지만 처음 주님을 만났을 때의 기쁨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신앙의 외형은 유지되고 있지만 내면의 영적 생명력이 약해지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시대에 에스겔 37장은 중요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마른 뼈가 가득한 골짜기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겔 37:3)고 물으셨습니다. 인간의 눈에는 아무런 가능성이 없는 죽음의 현장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자리에서 새로운 회복의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1. 이 시대는 마른 뼈와 같이 희망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2절을 보면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가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고 말씀합니다. 에스겔이 본 것은 생명이 넘치는 들판이 아니라 죽음의 골짜기였습니다. 그곳에는 수많은 뼈가 흩어져 있었습니다. 성경은 그 뼈들이 단순히 말라 있었다고 하지 않고 “아주 말랐다”고 기록합니다. 이것은 죽음이 오래되어 인간적인 가능성과 소망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를 보여줍니다. 이 환상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당시 이스라엘이 처한 역사적 상황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에스겔은 바벨론 포로 시대에 활동했던 선지자입니다. 유다 백성은 바벨론의 침략으로 나라를 잃었고 많은 사람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예루살렘은 함락되고 성전은 파괴되었습니다. 다윗 왕조도 무너졌습니다.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왔던 이스라엘에게 이러한 현실은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이었습니다.
그들의 절망은 11절에 그대로 나타납니다. “우리의 뼈들은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이것은 단순한 정치적 패배에 대한 탄식이 아니었습니다. 미래를 바라볼 믿음과 소망까지 잃어버린 백성의 고백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이스라엘의 상태를 마른 뼈가 가득한 골짜기로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에도 이러한 영적 메마름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정보는 넘쳐나지만 무엇이 진리인지 분별하기 어렵고, 물질은 풍성해졌지만 만족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경쟁과 성공을 위해 끊임없이 달려가지만 마음에는 평안이 없습니다. 인간관계의 수단은 많아졌지만 진정한 사랑과 신뢰를 찾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교회 역시 외적인 조건만으로 영적인 건강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좋은 시설과 다양한 프로그램도 필요하지만 그것이 교회의 생명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예배의 형식은 있지만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약해지고, 말씀을 듣지만 삶의 변화가 나타나지 않으며, 봉사하면서도 기쁨을 잃는다면 영적인 메마름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11장의 나사로 사건도 인간적으로 모든 소망이 끝난 상황을 보여줍니다.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되었을 때 마르다는 예수님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요 11:39)라고 말했습니다. 이미 장례가 끝났고 무덤의 돌문까지 닫혔습니다. 사람의 판단으로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무덤 앞에서 “나사로야 나오라”(요 11:43)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나왔습니다. 사람에게 끝이라고 생각되는 지점이 하나님께는 끝이 아니었습니다. 에스겔의 골짜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눈에는 죽음만 보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곳에서 생명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현실의 어려움만을 바라보며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가정과 교회와 다음 세대가 아무리 메마른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면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절망의 골짜기에서도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시는 분임을 믿으시길 축원합니다.
2. 하나님의 말씀만이 죽은 영혼을 살립니다.
하나님께서는 마른 뼈를 바라보고 있던 에스겔에게 명령하셨습니다. 4절에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흩어진 뼈들을 직접 맞추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른 방법을 연구하거나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라고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명령입니다. 왜냐하면 생명도 없고 들을 귀도 없는 뼈들에게 말씀을 선포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요한 영적 원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된다는 사실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자 빛이 생겼습니다. 존재하지 않던 것을 존재하게 하신 능력이 하나님의 말씀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공생애 기간에 말씀으로 병든 사람을 고치시고, 귀신을 내쫓으시며,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에스겔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말씀을 대언하자 골짜기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내가 명령을 따라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며 이 뼈 저 뼈가 들어맞아 뼈들이 서로 연결되더라”(겔 37:7). 죽어 있던 뼈들이 움직이고 흩어져 있던 뼈들이 서로 연결되었습니다. 말씀의 선포가 회복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누가복음 7장에 기록된 나인성 과부의 아들 사건에서도 동일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외아들을 잃은 과부는 장례 행렬을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남편을 잃은 데 이어 하나뿐인 아들까지 잃었으니 인간적으로는 깊은 절망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죽은 청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눅 7:14). 그러자 죽었던 청년이 일어나 앉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죽음의 상황을 생명의 상황으로 바꾸었습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한 지식이나 좋은 교훈이 아닙니다. 죄인을 회개하게 하고, 낙심한 사람에게 소망을 주며, 무너진 믿음을 다시 세우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오늘날 세상에는 수많은 지식과 정보가 넘쳐나고 있습니다. 인터넷과 인공지능을 통해 필요한 정보를 빠르게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영혼을 근본적으로 새롭게 하는 것은 정보의 양이 아닙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 멀어진 인간을 생명으로 인도하는 것은 복음이며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가장 분명하게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시대가 변하고 문화가 달라져도 복음의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힘은 화려한 건물이나 프로그램의 규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개인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심령이 메마르고 기도의 힘을 잃었을 때 다시 말씀 앞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지금도 살아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마른 뼈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에스겔 개인의 능력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대언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가정과 교회와 이 시대를 다시 살리는 힘도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있음을 기억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성령의 바람이 불 때 큰 군대로 일어섭니다.
에스겔이 말씀을 대언하자 흩어졌던 뼈들이 연결되고 그 위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가죽이 덮였습니다. 외형적으로는 사람의 모습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중요한 사실을 덧붙입니다. 8절에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고 말씀합니다. 모양은 갖추었지만 아직 살아 있지 않았습니다. 외형은 있었지만 생명은 없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다시 명령하셨습니다.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겔 37:9). 본문에서 ‘생기’로 번역된 히브리어 ‘루아흐’는 문맥에 따라 바람, 호흡, 영을 의미합니다. 에스겔 37장에서는 이러한 의미들이 연결되어 하나님의 생명 부여의 역사를 나타냅니다.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자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겔 37:10).
처음에는 골짜기에 흩어진 마른 뼈였습니다. 말씀을 통해 서로 연결되고 형체가 만들어졌으며,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가자 살아 있는 큰 군대로 일어났습니다. 이 장면은 오늘의 교회에도 중요한 의미를 줍니다. 교회에는 조직도 필요하고 제도도 필요합니다. 예배의 형식과 교육 프로그램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교회의 생명력을 만들어 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셔야 합니다. 성령의 생기가 불어올 때 교회는 살아 움직이며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사건이 이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제자들은 두려움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날 성령께서 임하시자 그들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성령 충만을 받은 베드로는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선포했습니다.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마음에 찔려 회개했고 세례를 받았으며, 초대교회 공동체가 세워졌습니다.
한국교회의 역사에서도 말씀과 기도 가운데 나타난 영적 각성의 역사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은 회개와 기도의 불길이 확산되면서 한국교회의 신앙 형성과 복음 전파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개인의 회개가 공동체의 변화로 이어졌고, 기도와 전도의 열정이 확산되었습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다시 붙들어야 할 것도 말씀과 성령입니다. 교회의 외형을 유지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성령께서 우리의 심령과 예배와 사역 가운데 역사하시도록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 메마른 심령이 살아나고, 식어버린 기도가 회복되며, 복음 전도의 열정이 다시 일어납니다.
특별히 다음 세대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급변하는 문화와 가치관 속에서 다음 세대가 복음에서 멀어지지 않도록 말씀으로 세우고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다음 세대를 바라보며 절망할 것이 아니라 마른 뼈도 큰 군대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에스겔이 처음 보았던 것은 “심히 많고 아주 마른” 뼈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과 생기가 임한 후 그들이 “극히 큰 군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기력한 존재를 단순히 살아 있게 하신 것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군대로 세우셨음을 믿으시길 축원합니다.
결론
A. W. 토저는 그의 책 『하나님을 추구함』에서 신앙의 본질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쌓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고 그분을 갈망하는 데 있음을 강조합니다. 신앙의 위기는 하나님에 대한 말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식어갈 때 찾아옵니다. 교회 역시 외적인 형식과 활동만으로는 생명력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하고 성령의 역사하심을 구할 때 메마른 신앙에 다시 생명이 흐르게 됩니다.
오늘 우리 앞에도 마른 뼈처럼 보이는 현실이 있습니다. 가정의 문제와 다음 세대의 신앙, 교회의 침체와 복음 전도의 어려움 앞에서 인간적인 한계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에스겔 37장이 보여주는 마지막 장면은 마른 뼈가 아니라 “극히 큰 군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마른 뼈가 움직이고, 하나님의 생기가 임하면 죽었던 자가 살아남을 믿으시길 예수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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