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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에 나타난 성령운동(15) /영국의 종교개혁과 청교도 운동 > 한상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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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인 목사

교회사에 나타난 성령운동(15) /영국의 종교개혁과 청교도 운동

페이지 정보

21-07-06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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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종교개혁은 왕에 의한 개혁으로 열매를 맺었다. 그래서 영국 국교회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백성들은 정치적인 개혁운동에 만족하지 못하고, 순수하고 뜨거운 말씀 중심의 신앙운동을 일으켰다. 이러한 청교도 운동은 사회적 경건과 미국 건국의 근본적인 신앙이 되었다.


1. 영국 헨리 8세와 그 이후의 종교개혁


1) 헨리 8세(1491-1547)의 영국 교회 독립 선언

헨리 8세가 로마가톨릭으로부터 영국 교회의 독립을 선언한 것은 가정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그는 왕비 캐서린(Catherine of Aragon)이 딸 메리를 낳았으나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핑계로 로마교회에 이혼을 신청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천일의 앤”이라는 앤 볼린(Anne Boleyn)과 열애에 빠져 1533년 왕비로 맞았고, 딸 엘리자베스를 낳았다. 그는 크랜머를 대주교로 세워 그의 혼인을 인정하게 하였으며, 로마가톨릭과 단절하였다. 그리고 1534년 영국 국왕이 교회의 유일한 머리라는 수장령(The Act of Supremacy)을 통과시키고, 다음해 교회 재산을 몰수하였다. 그가 죽자 그의 세 번째 아내를 통해 낳은 에드워드 6세가 9살의 나이에 즉위하였으나 6년간의 짧은 통치로 막을 내렸다.

 

2) 메리 여왕의 로마가톨릭 회귀

에드워드 6세가 죽자 헨리 8세의 장녀 메리(Mary)가 왕위를 계승했다. 메리 여왕은 부왕 헨리 8세와 동생 에드워드 6세의 모든 개신교적 개혁을 폐지하고 이전의 로마가톨릭으로 돌아갔다. 메리는 1553년에 즉위하여 1558년 11월 17일에 죽기까지 백명에 가까운 사람을 화형시키고 개신교회를 박해하였다.

 

3) 엘리자베스 여왕의 개신교 복귀

메리의 여동생으로 왕위를 이은 엘리자베스 여왕은 그의 어머니 앤 볼린의 결혼을 무효로 한 로마 교회에 대한 반감으로 자연히 개신교로 기울게 되었다. 그녀는 1559년에 국회에서 수장령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확실한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자 실망한 영국의 개신교인들이 “개인과 가정의 경건”을 추구하는 개인적 신앙 개혁을 추진하게 되었다.

 

4) 제임스1세

엘리자베스가 죽은 이후 스코틀랜드의 왕이었던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James I, 1566~1625)로 등극한다. 제임스는 라틴어 성경을 일반 영어로 번역하여 흠정역(Authorized version)을 편찬하였다(1611년). 그는 국교회의 수장으로서 백성들을 올바르게 하나님을 믿게 해야 한다는 생각에 교회의 의례와 교리에 대해서 매우 엄격하였고 이를 어기는 자들에 대해서는 가혹한 처벌을 내렸다.

 

5) 영국의 종교개혁의 특징

영국의 종교개혁은 종교적이라기보다는 정치적 사회적인 성격이 강한 개혁이었다. 일반 백성들의 신앙에 있어서는 뚜렷한 영적 각성도 없었을 뿐 아니라, 루터나 츠빙글리, 칼뱅, 존 녹스 같은 위대한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도 나오지 않은 개혁이었다.


2. 청교도의 신앙과 생활


1) 청교도 운동(Puritanism)

청교도 운동은 16세기말에서 17세기에 일어난 종교개혁운동이다. 청교도들은 엘리자베스 1세 통치 초기에 이루어진 종교협정 이후 존속되어온 로마가톨릭교회의 구습으로부터 영국 국교회를 정화하고자 노력했다. 청교도들은 강도 높은 종교경험을 강조하여 인간은 죄의 상태로부터 구원받기 위해서는 회개가 필요하고, 하나님은 설교를 통해 구원을 계시하며, 이성보다는 성령의 능력이 바로 구원의 수단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믿음은 자연히 당시 영국 국교회의 이신론적인 설교와 의식을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청교도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회심경험은 칼뱅주의에서 비롯된 예정론과 결합되어 자신들이 역사를 혁명적으로 변화시키라고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들이라는 선민의식을 갖게 했다. 

제임스 1세의 국가 주도의 개혁 분위기 속에서 일단의 청교도들이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1620년에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북아메리카 대륙으로 향했다. 이들은 지금의 미국 매사추세츠 주 플리머스(Plymouth)에 정착하게 된다. 그들은 이상적 교회와 사회를 건설하고자 함으로써 초기의 미국 청교도의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영국 내에서 국가를 변혁시키려는 사람들은 내전을 일으켰고, 의회파 청교도인 크롬웰이 승리함으로써 국왕 찰스 1세를 처형하고 공화정을 수립하였다.

 

2) 청교도들의 교회 생활

청교도들은 교회의식을 간소화하고, 오르간이나 십자가, 로마가톨릭교회의 미신적인 잔재들을 제거하여 예배를 정화시키고자 했다. 그들은 오직 성경 말씀의 준행과 철저한 주일 성수를 강조했다. 그들은 주일을 “장사와 오락을 중지하고 시간 전체를 예배와 교제, 선행에 아낌없이 바치는 날”이라고 법으로 정했다. 그들은 토요일에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하고 주일에 그 은혜에 잠기라고 했다. 주일은 아침과 오후, 또는 저녁 예배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주일에 가장은 가족을 교회에 데리고 가야 하며 나중에 자녀와 종들에게 설교를 철저하게 터득하였는지 확인해야 한다. 가장이 가족의 영혼을 돌보는 가장 중요한 날이 바로 주일이다. 청교도 지도자들로 토마스 카트라이트, 리챠드 박스터, 존 번연, 메튜 헨리, 존 오웬, 미국의 조나단 에드워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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