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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설교의 흐름(ⅩⅩⅩⅤ) > 조지훈 교수의 설교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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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설교의 흐름(ⅩⅩⅩⅤ)

조지훈 교수(한세대학교 설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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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은정 작성일25-12-19 13:58

본문



신약학자이면서도 동시에 설교학자였던 크래독

귀납적 설교방법은 설교신학과 관련되어있어

설교적 대안 제시 전에 근본 문제부터 진단해

 

조지훈 목사.jpg

설교자라면 누구나 은혜로운 말씀을 전하길 소망한다. 그러나 설교를 준비하고 전달하는 일이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성경에 대한 깊은 묵상과 연구, 철저한 원고 준비, 준비된 원고의 정확한 전달 등등 설교에는 다양한 활동들이 연관되어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설교 이론과 방법론이 계속해서 연구되고 개발되어온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설교 이론을 소개하고 설교 방법론을 제시하는 글을 연재한다. 목회 일선에서 오늘도 설교 준비를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설교자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                          <편집자주>


『권위 없는 자처럼』 초판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프레드 크래독은 원래 신약학을 공부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던 그가 설교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65년 필립스대학교 신학대학원에 교수로 초빙받게 되면서부터이다. 필립스대학교 신대원에서 신약학과 설교학을 동시에 강의해줄 것을 제안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설교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그는 1971년 『권위 없는 자처럼』이라는 책을 출판하면서 설교학계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바로 ‘귀납적 설교방법론’이라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크래독 하면 귀납적 설교를, 귀납적 설교 하면 크레독을 떠올리게 되었다. 

 

크래독의 귀납적 설교를 이야기할 때 바로 잡아야 할 두 가지 오해가 있다. 첫째, 귀납적 설교는 “어떻게 설교를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탄생한 방법론이 아니라는 점이다. 귀납적 설교 - 이와 관련된 내러티브 설교를 포함해서 - 는 설교에 대한 신학적인 고민으로부터 탄생한 것이다. 크래독의 관심은 “변화하는 시대 속에 서 있는 오늘의 청중으로 하여금 어떻게 복음의 말씀을 새롭게 듣게 할 것인가”였다(김운용, “역자 서문”, 『권위 없는 자처럼』, 21). 그의 고민은 변화된 세상 속에서 ‘설교란 무엇이며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신학적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였다. 

 

크래독이 이 책을 집필하던 시기 미국의 상황은 설교를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생각했고, 교회 안의 사람들은 과거의 좋았던 부흥의 시대를 회상하고만 있었다. 그런 시대에 크래독은 “교회는 옛 기억이나 되살리면서 서 있을 수는 없다. 새로운 형태의 목회는 밝아오는 새 아침의 필요에 부응하기 위해 그저 하룻밤 사이에 지어내거나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며 “교회가 이렇게 힘을 잃어가는 것은 강단이 바로 서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권위 없는 자처럼』, 32). 교회 위기의 한 축이 곧 설교의 위기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 문제를 극복할 수 있을까? 크래독은 대안을 제시하기 전에 설교에 대한 기존 가르침에 대한 신중한 재평가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설교가 저평가되고 있는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 

 

크래독은 그 첫 번째 이유를 미국의 행동주의 신학에서 찾는다. 행동주의 신학은 말 그대로 행동을 강조하는 신학이다. 말보다 행동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말로 행하는 설교에 대한 기대감이 없고 설교가 가진 능력 역시 과소평가되어있다. 그러나 크래독은 “설교는 세울 수도 있고 무너뜨릴 수도 있으며, 묶을 수도 있고 풀어놓을 수도 있으며 축복을 전할 수도 있고 저주를 전할 수도 있다”고 강조한다.

 

설교가 저평가되는 두 번째 이유는 언어와 관련된다. 오늘날 시각을 중심으로 한 미디어의 공격은 언어가 가진 의미를 상실하게 했고 종교적인 언어는 불신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무엇보다도 종교 언어가 불신의 대상이 된 것은 “믿음의 세계를 보다 생명력 있게 전하는 것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늘 전통과 과거의 언어들에 얽매여 거기서 벗어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 때문”이라는 것이 크래독의 분석이다(40). “안타깝게도 교회는 니케아, 칼케돈, 아우구스부르그 등지에서 믿음을 보존하기 위해 싸웠던 그 옛 언어들 대신 새로운 언어를 개발할 적절한 프로그램을 아직 가지고 있지 않다.” 

 

교회 언어와 관련해 크래독이 진단하는 또 다른 문제는 교회 언어를 과학적인 관점에서 이해할 때 발생한다. “과학적 방법론의 모델은 언어를 하나의 기호로 이해하고, 검증되어야 할 어떤 정보를 나타내는 척도로만 생각”한다(41). 언어를 이렇듯 과학적으로 이해하게 되면 교회의 언어는 의미를 환기시키는 표현이나,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내는 언어나 비유, 신화 같은 것도 금지해야 한다. 그러나 “언어는 어떤 사물을 명시하기 위해 과학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중요한 기능이며 어떤 분야에서는 아주 필요한 것이지만, 오직 그러한 기능만 허용한다면 아주 끔찍하 단순화”가 일어나고 말 것이다. 이와는 달리 “언어는 인간의 사고와 배움, 느낌과 나눔에 있어 아주 풍부하고도 다양한 기능들을 가지고 있는데 이 한마디의 언어를 통해서 거대한 것들이 유도될 수 있다”(41).

 

설교 저평가의 원인 세 번째는 TV와 같은 매체의 영향으로 외부로부터 오는 정보에 대한 인간의 지각 방식(sensorium)이 변했기 때문이다. “강단은 전통적으로 말(word)과 이야기, 그리고 역사를 사용해 왔다. 그러나 TV는 이미지와 그림을 통해 메시지를 전함으로 인간의 지각기관을 개편하게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청각이 시각에 중심 자리를 내어주고 만 것이다. 

 

크래독은 청각에서 시각으로 변화가 성경 역사 속에서도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고 말한다. 구두 전승되던 말씀들이 기록된 말씀으로 변형된 것이다. “인쇄 문화에 의해 말씀은 이제 공간 영역(space)에 고착되고, 말씀의 의미 역시 고착된 개념을 만들어냈다. 결과적으로 기록된 말은 구두로 전해지는 말보다 권위적인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44). 이제 구두로 전해진 말보다 책에서 읽은 것들이 보다 사실적이고 직접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설교자에게 던져지는 질문은 이것이다. 

 

“구두로 전달하는 스타일은 도대체 어디에 적합한 것인가?” “정말 구두로 전달하는 스타일이 오늘의 시대에 적합한가?” “인간의 목소리가 개인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있다고 여겨져 왔는데, 그것이 오늘날의 문화 속에서도 그 위치를 잃지 않고 여전히 영향력이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기계화되고 비인간화된 세계에서도 여전히 필요한 것이며, 정말 절대적으로 있어야 할 요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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