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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설교의 흐름(ⅩⅩⅩⅥ) > 조지훈 교수의 설교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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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설교의 흐름(ⅩⅩⅩⅥ) > 조지훈 교수의 설교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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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설교의 흐름(ⅩⅩⅩⅥ)

조지훈 교수(한세대학교 설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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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은정 작성일26-01-26 13:44

본문


불확실성 시대에 설교가 가능한가

대화 중심의 사회에서 ‘독백’ 중심의 설교가 가능한가

화자-청자 관계에 대한 새로운 대안 필요해

 

조지훈 목사.jpg

설교자라면 누구나 은혜로운 말씀을 전하길 소망한다. 그러나 설교를 준비하고 전달하는 일이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성경에 대한 깊은 묵상과 연구, 철저한 원고 준비, 준비된 원고의 정확한 전달 등등 설교에는 다양한 활동들이 연관되어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설교 이론과 방법론이 계속해서 연구되고 개발되어온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설교 이론을 소개하고 설교 방법론을 제시하는 글을 연재한다. 목회 일선에서 오늘도 설교 준비를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설교자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                         <편집자주>


『권위 없는 자처럼』에서 크레독이 제시하는 설교가 저평가되는 네 번째 이유는 설교자들이 급격하게 변화된 세상 속에서 신앙의 확실성을 상실하고 점점 불확실성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p. 45). 기독교 신앙은 진리와 영원에 대해 말한다. 신앙의 고백은 확실성에 대한 믿음에 기반한다. 그러나 어떤 주제에 대해 강한 확신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 외면당하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객관적 신 존재에 대한 논의보다 한 개인의 주관적인 경험이 더 중요한 시대가 된 것이다. 경험만이 어떤 실체의 본질을 이해하는 유일한 길이 되어버렸다. 

 

크레독은 이런 시대를 압축해서 “모든 것이 가지는 우연성(contingency)과 피조물성(creatureliness)”이라고 표현한다(As One without Authority, 2nd ed., 11). 우연성이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불변하지 않고 언제든 변할 수 있음을 나타낸다. 피조물성이란 인간이 창조된 존재이며 한계를 지닌 존재라는 의미이다. 모든 것이 순간적이며, 한계를 지니며, 늘 불확실 속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내가 경험한 것만이 가장 확실하다.”라는 명제가 가장 중요한 것이 되어버렸다. 심지어 하나님에 대해 말을 할 때도, “대개 수동태로 표현되거나,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우리의 체험”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Authority, 12). 만약 신앙이 불확실한 것을 믿는 것이라면 이것은 소유할 수 없는 것을 소유하려는 인간적인 노력일 뿐이다. 당연히 믿지 못하면서도 믿는 척해야 하는 불안과 위선이 뒤따르게 된다. 변화와 불확실성이 만연된 세상에서 설교자들은 여전히 동일한 방법과 형식으로 설교하거나 시대에 뒤처지고 사람들의 삶과 동떨어진 설교를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진정한 의미의 커뮤니케이션은 아니다. 특히 계속해서 급변하고 불확실성이 만연된 세상에서 설교자가 겪는 고충은 그가 행한 설교의 시의적절성에 관한 것이다. 불확실한 시대에 확실한 하나님에 대해 말할 수 있는가? 급변하는 세상에서 어제 내가 선포한 말들이 오늘은 그 의미를 상실한 것은 아닌가? 그러기에 오늘날 “목회자들은 상대성과 잠정적인 가능성들의 늪을 지나 사람들을 이끌려고 애쓰고” 있는 것과 같다고 크레독은 묘사한다(Authority, 13). 

 

이와 같은 크레독의 현실 분석은 21세기 한국의 설교 환경을 묘사하는 것만 같다. 한국 사회 역시 개인주의와 불확실성이 만연한 사회가 되었다. 경험이 중요하며 미래의 불확실성을 어떻게 하면 최소화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세상이 된 것이다. 기독교인들 역시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가치관과 세계관으로부터 자유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크레독에 의하면 설교가 어려움을 겪게 된 다섯 번째 이유는 설교자와 회중의 관계로부터 기인한다. 서구 사회에서 기독교 붕괴의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교회를 지지하던 문화의 상실이다. 이것은 설교자와 설교자가 속한 교회, 교단, 그리고 성경이 기존에 누리고 있던 권위의 상실을 의미한다. 이전 시대의 설교자들은 이미 가정된 권위 아래 설교를 행했다. 그 권위는 설교자 자신은 물론 회중에게도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대가 변했다. 민주주의 발전은 설교단이 누리던 권위를 더 이상 인정할 수 없게 만들었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기 때문이다. 한편 크레독은 설교단이 누리던 권위의 몰락의 중요한 원인으로 젊은 목회자들이 받았던 신학교 교육을 지목한다. 신학교 교육의 특징은 모든 사람이 말할 수 있고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교육을 받고 목회자로 갔을 때, 젊은 목회자들은 당황하게 된다. 설교단에서는 오직 설교자만이 말할 수 있으며 모든 회중이 듣기만 해야 하기 때문이다. “설교자는 대화가 기반된 세계(a dialogical world)에서 독백(a monologue)을 통해 계속해서 섬길 수 있을지를 심각하게 질문할 것이다”(Authority, 15).

 

마지막으로 크레독이 말하는 현대 설교가 약화된 이유는 커뮤니케이션의 한 형태로서 설교가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다. 잡담을 나누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의미있고 중요한 커뮤니케이션을 행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라고 크레독은 말한다. 커뮤니케이션의 한 형태로서의 설교가 가지는 어려움은 예언자들과 예수님의 삶을 통해서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들의 선포는 사람들의 마음을 열리게 할 수도 있었지만 동시에 닫히게 할 수도 있었다. 그만큼 설교를 행한다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설교를 행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젊은 목회자들이 강단을 떠나는 것이다. “기독교 설교는 부담이 크고(demanding), 진을 빼며(exhausting). 고통스럽고, 관계된 모든 이들에게 위기를 초래한다. 진리의 순간은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는 결정의 순간이기도 하다”(Authority, 16).

 

이렇듯 설교의 위기를 언급한 크레독은 이런 위기 극복의 대안으로 제시된 몇 가지 방법들을 살펴본다. 첫 번째는 신학교에서 설교학을 좀 더 가르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크레독은 변화된 사회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진행되는 설교학 수업은 의미가 없다고 강조한다. 설교학에 대한 더 많은 시간 투자가 오히려 과거의 문제들을 더욱 고착화시킬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주제 설교의 부활이다. 강해설교나 성경적인 설교가 성경에 집중함으로써 과거에 너무 함몰되어있는 것에 반해 주제 설교는 적실성, 곧 일상적인 언론과의 더 많은 접촉을 가능하게 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설교 방식이 설교의 발전을 가져온 것도 사실이지만 그 이면에는 설교의 진정한 의미를 잃어버릴 수도 있는 유혹이 도사리고 있다. 즉, “설교자들은 신문에서 무엇을 가져오느냐가 아니라, 신문에 무엇을 가져가느냐 때문에 설교할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것이다(Authority, 17). 한편, 크레독은 주제 설교와 같이 적실하고, 흥미로운 설교가 선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회중 사이에서 이런 설교에 대한 거부감이 이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묻는다. 그리고 그와 같은 설교에서 결정적으로 빠져있는 것이 있다고 대답한다. 바로 “현재의 화자(speaker)-청자(hearer) 관계에 적합한 선포의 방식(a mode of proclamation)”이다”(Authority,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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