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ght_maket_banner.png
순복음홍성교회 라동옥 목사가 직접 농사지은 벌꿀판매
이태근 목사와 함께하는 아침묵상
본교단 업무협약 업체 / 기하성회원 특별우대
홍영건장로
하나로의료재단
종교인과세

현대 설교의 흐름(ⅩⅩⅩⅧ) > 조지훈 교수의 설교로의 초대

본문 바로가기

현대 설교의 흐름(ⅩⅩⅩⅧ) > 조지훈 교수의 설교로의 초대




최근에 많이본뉴스
오피니언
특별기고란
목자의 뜰

현대 설교의 흐름(ⅩⅩⅩⅧ)

조지훈 교수(한세대학교 설교학)

페이지 정보

작성자 이주희 작성일26-03-04 14:31

본문


언어의 원시적 의미 복원되어야 

언어가 가진 창조적 수행 능력 강조해

설교자는 먼저 말씀을 듣는 자 되어야

 

조지훈 목사.jpg

설교자라면 누구나 은혜로운 말씀을 전하길 소망한다. 그러나 설교를 준비하고 전달하는 일이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성경에 대한 깊은 묵상과 연구, 철저한 원고 준비, 준비된 원고의 정확한 전달 등등 설교에는 다양한 활동들이 연관되어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설교 이론과 방법론이 계속해서 연구되고 개발되어온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설교 이론을 소개하고 설교 방법론을 제시하는 글을 연재한다. 목회 일선에서 오늘도 설교 준비를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설교자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 <편집자주>


크레독이 제시하는 설교가 여전히 필요한 세 번째 이유는 ‘말’(word)과 ‘담화’(speaking)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근거한다. 특히 언어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철학 분야에서 활발하게 진행되었는데, 크레독은 철학적인 언어 이해를 근거로 자신의 설교학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언어에 대한 철학적인 이해는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 번째는 말을 검증할 수 있는 의미를 예시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과학적 방법론, 특히 논리실증주의에 근거한 이런 이해는 터무니없는 진술을 제거함으로써 터무니없는 것과 타당한 것, 다시 말해 입증할 수 없는 것과 입증할 수 있는 것을 구분하려는 시도이다. 이런 언어 이해는 과학적인 영역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언어 이해는 형이상학의 영역에서는 중립성, 또는 불가지론적인 입장을 취하게 만든다. 형이상학의 영역에서 사용되는 용어 중 상당수는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지금 밖에 비가 온다.”처럼 눈으로 직접 확인 가능한 것은 참이다. 그러나 “영혼은 불멸한다.”와 같은 명제는 증명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거짓’이 아니라 ‘무의미’(nonsense)하다. 

 

언어에 대한 철학적 이해의 두 번째는 언어가 가지고 있던 ‘원시적인 의미’를 복원하는 시도이다. “본래 언어는 인간 영혼에 무한한 봉사를 했으며, 춤추고 노래하며, 괴롭히기도 하고 유혹하기도 하며, 규명하기도 하고, 울고, 판단하며, 변화시키는 힘을 가졌다”(크래독, 『권위 없는 자처럼』, 79). 이와 같은 언어 이해는 언어에 대한 이해를 보다 확장해주었다. 언어는 인간 경험을 가능케 해주는 ‘선험적인 것’(transcendent)이며, 창조하고 수행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언어가 선험적이라는 것은 언어가 경험보다 앞선 것이며, 경험보다 앞서 주어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언어를 알기 전 내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저 무질서한 데이터에 불과했다. 그러던 언어는 무질서의 소용돌이 속에 질서를 부여해주고 그 안에서 의미를 발견하게 해주는 ‘틀’(frame)이 되는 것이다. 

 

또한 오스틴의 주장처럼 말은 무엇인가를 행하고 일으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언어는 무엇을 가능하게 하는 행동(deed)”이 되는 것이다. 언어에 대한 이와 같은 철학적 이해는 성경에서도 발견되는 내용이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 역시 말이 가진 실행력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크레독은 여러 철학자를 인용하며 언어가 가진 힘에 대해서 논의를 전개해간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그들 철학자들의 언어 이해 자체가 아니라 이를 통해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인간 언어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것이며, 삶에 대한 표현으로서 그것을 견지하는 것이다”(크래독, 『권위 없는 자처럼』, 84). 

 

설교가 여전히 필요한 이유를 크레독은 신학적, 성경적 연구 분야에서 찾는다. 19-20세기를 거치면서 성경에 대한 연구방법들은 놀랍게 발전했다. 다양한 분야에서 사용되던 연구방법들, 예를 들어, 문학비평, 역사비평, 본문비평, 양식비평 등이 성경 연구에 차용되었다. 이런 연구방법들은 성경을 보다 깊게 연구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연구방법들은 두 가지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첫째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하는가의 문제이고 둘째는 그 말씀이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어떤 연관성을 갖는가의 문제이다. 이런 문제의 근저에 역사비평학이 있다. 역사비평학은 성경의 원래 자리, 곧 성경의 저자, 독자, 그들의 역사적 삶의 자리에 관심을 갖는다. 이를 위해서 다양한 분석 기법들을 차용한다. 그러나 역사비평학자들의 눈은 과거에 고정되어있다. 그런 관점에서 도출된 결과는 당연히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고리타분한 것들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제시된 것이 불트만의 실존철학에 근거한 비신화화 신학이다. 불트만은 성경의 기록들이 1세기의 신화적 세계관 속에서 기록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기에 신화라는 껍데기를 벗겨내고 그 신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실존적 의미’를 발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존적 의미란 성서의 이야기가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나 객관적 정보가 아니라 지금 여기 있는 나의 삶에 어떤 결단을 요구하는지로 이해하는 것이다. 성경이 가지는 현재성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크레독은 비신화화가 갖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불트만이 보여준 역사비평적 성경 이해는 반대한다. 예를 들어, 비신화화라는 이름으로 성경의 기적 이야기의 역사성과 사실성을 부인하는 것 등이다. 

 

크레독은 성경신학이 가진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을 하이데거의 철학에서 발견한다. 하이데거에게 언어는 존재와 진리를 이해하는 도구가 아니라 존재의 본질 자체이다. 즉, “가장 궁극적인 존재 그 자체는 언어를 통해 표현된다.”라는 것이다. 언어는 이해를 선행하고 우리의 삶은 언어를 통해 구성된다. “말하고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인간만이 가지는 최고의 선물이다”(크래독, 『권위 없는 자처럼』, 91). 

 

언어라는 것이 인간 삶의 핵심적인 요소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언어 이해는 성경 곳곳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창조된 인간은 모든 피조물에게 이름을 부여해주는 명령을 받았다(창 2:19).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부르셨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다. 말씀이셨던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말씀의 참 의미가 무엇인지를 삶을 통해 보여주셨다. 

 

그러기에 설교자는 말씀을 먼저 듣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크레독은 조언한다. “오히려 우리는 말씀을 먼저 들어야 하며, 불분명한 우리 삶의 상황에 희망의 빛을 비추어 줄 말씀을 들으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말씀이 해석한다 … 성서신학 연구의 목표를 하나님이 성경본문이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인간에게 말씀하실 수 있도록 하는 데 두어야 한다”(크래독, 『권위 없는 자처럼』, 92).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총회소개구독안내광고안내고충처리안개인정보취금안내 및 이용약관홈페이지 제작안내공지사항모바일 버전으로 보기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총회신문 / 등록번호 : 서울 아04649 / 등록일 : 2017년 08월 07일
발행인 : 양재철 목사 / 편집인 : 송시웅 목사
주소 : 서울특별시 노원구 노해로 81길 22-26(상계동) / TEL: 02-782-0933 / Fax: 02-782-3372 / 발행일 2005년 03월 02일
청소년보호 책임자 : 이은정 (02) 720-6839
Copyright ⓒ 2017 기하성총회신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