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렘 18:1~6)
배병로 목사(일산서지방회장, 열방선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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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3-01-19 12:55본문
올 한해 우리가 드리는 모든 예배가 온전히 주님께 열납이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뵈옵는 향기로운 예배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깨지기 쉽고 보잘 것 없는 질그릇과 같은 우리 인생들이 토기장이 되신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고 예배드림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사는 존귀한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에 나오는 선지자 예레미아는 주전 627년부터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된 586년 이후 얼마까지 유다 왕국에서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아의 눈물과 애원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돌이키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만 갔습니다.
예레미아의 모든 힘은 소진되었고, 예레미아가 그러한 절망의 상황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소망의 비전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아에게 ‘너는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렘18:2)고 하셨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겠다” 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게 됩니다. 바로 그때,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셨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렘 18:6).
새해가 시작되는 즈음에 우리 모두가 자신의 자리에서 일어나 토기장이신 하나님 손에 올려지고 하나님의 작품으로 완성되어지도록 돌림판 위에 머물러 있기를 소원합니다.
최근에 읽은 마크 핸비가 쓴 ‘토기장이 하나님’이라는 책 표지에 이렇게 써 있습니다.
“토기장이 하나님의 돌림판을 바라보라!!” 그리고 작은 글씨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먼저 그분의 돌림판을 바라보지 않는다면...”이라고 씌어져 있습니다. 영어식 표현인데 바로 번역하면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그분의 돌림판을 바라보라”는 말일 것입니다.
마크 핸비는 어느날 기도하는 중에 주님이 자신의 마음에 분명한 말씀을 하셨는데 마치 누군가가 나를 잡아 흔들어 돌려 세운 뒤 말을 하는 것 같았다고 하면서 “네가 먼저 하나님의 돌림판을 보지 않는다면 내 뜻을 결코 알지 못하리라.”
그러면서 질문을 해 봅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을까?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를 하지만, 그분의 뜻을 놓치는 경우도 있을까? 고난은 나의 잘못에 대해 내리시는 처벌일까?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 왜 이렇게 힘들까? 오늘날의 교회는 왜 이렇게 위축되어 있을까?”
마크 핸비는 이런 질문들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을 우리에게 제시해 줍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돌림판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영어로 [Perceiving the Wheel of God. ] Perceiving 인지하다 바라보다 통찰하다. 진행형이니까 끊임없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돌림판을 바라볼 때에 토기장이이신 하나님의 손가락이 우리들의 영혼 속에 놓여 있다는 뜻이고 그 분의 다스림, 통치안에서 토기장이의 손에 있는 진흙인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믿는 자가 가지는 애매함에서 벗어나는 길은 하나님의 뜻을 알 때 가능합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의 손이 움직이는 돌림판을 바라볼 때 가능하다고 마크 핸비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그릇이 되어가는 과정과 도자기가 토기장이의 돌림판 위에 만들어지는 과정이 흡사하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당시 절망에 빠진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가라 거기에서 내 말을 네게 들려주리라.”
올 한해 불투명한 전망으로 가득한 세상에 사는 우리들에게 주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인간을 빚으시는 최고의 토기장이 이십니다. 그 분은 실수를 안 하십니다.
녹로 위에서 그릇이 빚어진다는 것은 삶의 현장 속에서 일상생활의 환경이 우리의 인격을 빚는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사람마다 환경이 다릅니다. 타고난 유전, 기질, 환경은 대개 우리가 통제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만드는데 아주 강력한 영향을 미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빚어 가신다는 사실은 정말 우리 모두에게는 놀라운 복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의 토기장이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때로 우리를 완성된 아름다운 그릇으로 만들기 위하여 우리를 물에 담그기도 하시고, 우리를 밟기도 하시며, 우리가 정신을 못자릴 정도로 빨리 돌리기도 하고, 우리에게 칼과 같은 시련으로 상처를 내기도 하시고, 또 때로는 우리를 뜨거운 가마불 속에 넣기도 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인생길에는 때로 뜨거운 불과 같은 시련이 다가옵니다. 고통스럽지만 이상하게 여길 것은 아닙니다.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
이 모든 연단의 과정을 거친 후에 토기는 더욱 순수해지고, 단단해지고 아름다운 작품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그 그릇이 멋지게 만들어져 가다가 그만 깨어지고 마는 때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3-4절에 “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즉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터지매.” 여기서 ‘터지다’라는 말은 ‘깨어지다, 손상되다, 상처입다’라는 뜻입니다.
토기장이는 그릇을 귀하고 쓸 만한 그릇으로 만들려고 하지만 만드는 과정에서 깨어지는 그릇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그릇은 처음 만들 때 깨어지고, 어떤 그릇은 유약을 칠하다가, 어떤 그릇은 가마에서 굽다가 깨어지기도 합니다.
우리들 중에도 주를 믿는 사명을 감당하다 그만 불치의 병으로 ‘건강’이 깨어지고 말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들을 볼 때, 사람은 깨어질 수밖에 없는 지극히 연약한 질그릇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격도, 신앙도, 도덕성도, 건강도, 쉽게 깨어지는 질그릇과 같이 그렇게 깨어지고 상처 입는 존재가 바로 우리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4절 말씀에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터지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좋은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했습니다.
질그릇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비록 깨어질 수는 있으나 그렇다고 그것이 끝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토기장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버리시지 않고 다시 부서지고 깨어진 인격과 신앙과 건강을 회복시켜 주시고 아름답고 귀한 그릇으로 만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단순하게 믿음으로 겸손하게 받아들이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 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라”(롬 5:3).
거저 소망을 가지고 겸손히 주님의 손길에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이를 때까지 우리는 항상 이 돌림판 위에 있음을 기억하며 토기장이 하나님의 손길에 온 몸과 마음을 맡겨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질그릇같이 약하고 깨어지기 쉬운 존재이지만, 우리 안에 ‘예수님의 생명’이 있기에, 세상에서 가장 보배롭고 존귀한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모인 “교회가 세상의 희망이다”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를 향한 눈물과 애원을 가지고, 예레미야처럼 말씀을 받기를 원합니다.
“너는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토기장이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다. 오직 믿음으로 우리 모두가 토기장이 되시는 하나님의 돌림판 위에서 새롭게 만들어지는 그릇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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