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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리아에도 큰 기쁨이” (사도행전 8장 4~13절)

전상균 목사(광주지방회 증경회장, 신광순복음교회)

페이지 정보

작성일25-06-16 13:57

본문

전상균 목사(광주 증경).jpg

요한복음 4장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수가성 야곱의 우물에서 낮 12시에 물을 길러 온 여인을 만나신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주시는 분’이심을 드러내셨고, 수가성 사람들은 ‘내가 메시아를 만났다.’는 여인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자기들의 동네로 모시고 와서는 이틀 동안 예수님의 말씀을 듣게 되고, 사마리아 수가성에 믿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이렇게 마무리됩니다.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에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요 4:42). 그렇게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고 사랑하셨고, 그들에게도 복음의 말씀을 전하심으로 당신이 ‘세상에 오신 구주’(메시아)라는 사실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물론 모든 사마리아 사람들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사마리아 사람 중에는 예수님께서 살아 계실 때 예수님을 직접 본 사람도 있었고,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구주’(메시아)라 믿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에는 예수님에 대한 실망감으로 가득했고,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이야기도 소문으로 들었을 것입니다. 그 후 시간이 흐르면서 예수님에 대한 기억들이 희미하게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다시금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그게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사도행전 1장에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1:8).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제자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아마도 황당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에서 내 증인이 되어야 해!’라는 말씀은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에서도’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에는 ‘어떻게 그런 일이!’ ‘우리가?’라고 놀랐을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사고 속에는 이방인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처럼, 사마리아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는다는 것 역시 용납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그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해진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해지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생겨나자, 본문 14절의 말씀처럼 베드로와 요한이 직접 사마리아를 찾아갑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직접 사마리아에 찾아왔다는 것은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해졌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사건이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이 사마리아에 직접 찾아왔다는 것은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해진 이 일이 엄청나게 충격적인 일이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사마리아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여? 이런 일이 정말 가능한 거야?’라는 분위기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단순히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해졌다는 것만을 전해주고 있진 않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사마리아에 큰 기쁨이 있었다고 말씀합니다. 본문 8절의 말씀입니다.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이 말씀은 결코 단순하지 않습니다. 그건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파된 과정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스데반이 산헤드린 공회에서 복음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스데반은 ‘하나님은 손으로 지은 건물 안에만 머물고 계신 분이 아니라고, 그리고 너희들은 율법을 받았다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사람들인데 실제로는 조상적부터 율법을 숱하게 어기며 살아오지 않았느냐’고 책망했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산헤드린 권력자들과 그 말을 들은 유대인들은 마음에 분노가 가득하여 이를 갈며 결국 스데반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 가운데, 사울이라는 청년의 분노는 더욱 컸습니다. 그는 다른 이들과 달리 교회를 진멸하려 했습니다. 이런 박해로 인해 예루살렘 교회는 사도들을 제외하고 모두 뿔뿔이 흩어지게 됩니다. 그렇게 흩어진 사람들은 유대와 사마리아로 피신해 가면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흩어진 사람들이 유대 다른 고을로 흩어졌다는 것은 그래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흩어진 사람들이 사마리아로 갔다는 것은 굉장히 이례적인 일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유대인이라면 사마리아 땅은 밟지도 않는 것이 유대인들의 오래된 관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품은 사람들은 그런 관습을 깨뜨렸습니다.   

 

사마리아로 흩어졌고, 그곳에서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박해를 피해 피신하는 사람들이라면 조용히 숨어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복음의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예루살렘을 떠나 피신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숨어 지내는 것이 아니라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 안에는 성령의 은혜, 복음의 감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한 대표적인 사람이 빌립입니다. 그리고 복음이 전해진 결과 ‘그 성에 큰 기쁨이 있었다’고 말씀합니다. 복음이 전해진 곳에 큰 기쁨이 있었다는 표현은 오늘 본문, 사마리아가 유일할 것입니다. 

 

그러면 왜 빌립이 복음을 전한 사마리아에 큰 기쁨이 있었다고 기록한 것일까요? 물론 오늘 본문 앞에 빌립을 통해서 표적(기적)이 나타났고, 더러운 귀신이 소리 지르며 떠나가고, 중풍병자 등이 고침 받았다고 나옵니다. 그런데 그런 이유 때문에 사마리아에 큰 기쁨이 있었던 것일까요? 이후에도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서 그런 기적같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도 기적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큰 기쁨이 있었다고 기록하진 않습니다. 

 

성전 미문에 앉아 있던 앉은뱅이 걸인이 고침 받은 이후, 예루살렘 교회는 박해를 받았습니다. 루스드라에서 앉은뱅이를 고쳐주었지만, 사람들이 사도 바울을 죽은 줄로 알 때까지 돌로 쳤습니다. 

 

빌립보에서 귀신 들린 여종을 고쳐준 후에, 바울과 실라는 죽도록 매를 맞고 깊은 감옥에 갇혀야 했습니다. 에베소에서는 사도 바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병이 떠나가고 악귀가 쫓겨났습니다. 그런 기적이 일어났지만, 에베소에 기쁨이 있었다는 말은 없습니다. 대신 아데미 여신의 신상을 만들어 파는 사람들이 사도 바울을 죽이겠다고 아우성을 치는 바람에 사도 바울이 도망치듯 에베소를 빠져나와야 했습니다.

 

단순히 빌립을 통해서 사마리아에서 귀신이 쫓겨나고 병든 사람이 고침 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그 성에 큰 기쁨이 있었던 것은 아님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사마리아에 큰 기쁨이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실마리를 5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빌립이 복음을 전파했다고 기록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전했다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를 전했다’는 말은 예수가 메시아라고 전했다는 말입니다.

그 예수가 누구입니까? 수가성 야곱의 우물에서 여인을 만나주셨던 예수님입니다. 그 여인으로 인해 수가성의 많은 사람이 이틀 동안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구주’라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 예수님은 다른 유대인들과 달리 늘 사마리아를 지나서 다니셨고, 사마리아 사람들을 차별없이 대해 주셨던 분입니다. 더군다나 마지막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메시아일 것이라고 기대했던 자신들의 기대가 어긋나는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 때 배신감을 느낀 제자들이 사마리아에 불을 내려 멸해버리자고 말했는데도,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나무라지 않으시고 오히려 제자들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런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빌립이 들고 온 소식은 그 예수님이 메시아(그리스도)였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은 예수님을 잊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이야기는 전해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막연하게나마 예수님의 제자들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고 증언하고 다닌다는 이야기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기억 속에서 예수님은 차츰 잊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빌립이 와서는 그 예수님이 메시아였다고,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우리의 구주가 되셨다고 증언해 줍니다. 그리고 그 증언이 사실이라는 듯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니 귀신이 쫓겨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니 병든 사람들이 낫습니다. 그런 현상들을 보니 우리가 알던 그 예수님, 우리를 무척이나 사랑하셨던 그 예수님이 메시아(구세주)이심이 분명했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되니 너무나도 기뻤습니다. 그리고 마치 빌립을 통해서 그 예수님이 자기들에게 찾아오신 것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지금 자신들의 눈 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적과 표적이 모두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9절 이하에 나온 것처럼, 사마리아에는 마술사 시몬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칭 ‘큰 자’라고 부를 정도로 사마리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모두 그가 행하는 마술로 인해 놀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기적은 시몬의 마술과는 질적으로 달랐습니다. 예수 이름에는 자기들이 부러워하고 두려워하던 마술사 시몬까지도 굴복시키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시몬도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을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마술사 시몬이 행하는 마술에 마음과 정신을 빼앗긴 영적 노예로 살던 사람들인데, 그 사마리아에 예수님의 이름, 예수님이 메시아(그리스도)라는 복음이 전해지면서 그들은 참된 자유와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그것은 시몬의 마술을 보고 놀라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내적 기쁨이었습니다.


여러분,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빌립이 박해를 피해 흩어지던 중에 사마리아에 예수의 이름을 전했고, 사마리아에 큰 복음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온 성이 기쁨으로 가득했습니다.

 

처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들은 그게 무슨 말씀인지 몰랐을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사마리아에서 증인이 되어 복음을 전하라고요?’ 하는 의문이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사마리아에 복음의 씨앗이 심겨져 열매 맺도록, 그 밭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비록 유대인들이, 그리고 유대인인 제자들이 사마리아에 가는 것을 굉장히 꺼려했을지라도, 예수님께서는 그곳에 복음이 심겨지도록 준비해 놓으셨고, 때가 되어 헬라파 유대인인 빌립을 통해 그곳에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유대인들에게 사마리아가 있듯이, 우리에게도 심리적인 사마리아가 있습니다. ‘저 사람에게는 복음을 전해도 받아들이지 않을거야’라고 생각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저 사람 마음에 들지 않아. 벌을 받았으면 좋겠어.’라고 생각되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저기에는 예수의 이름을 전해도 아무도 믿지 않을거야’라고 생각되는 곳일 수 있습니다. 그곳이 오늘 우리에게 사마리아입니다.


여러분!! 분명하게 기억하십시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에도 복음을 전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 ‘예루살렘 교회의 박해’라는 독특한 방법으로 제자들을 흩으시더니,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곳은 이미 예수님께서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준비해 놓으신 곳이었습니다. 우리는 가기를 꺼릴지라도 주님은 그곳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 당신의 뜻을 이루실 준비를 다 해놓으십니다.

 

우리가 가기를 꺼려하는 사마리아가 어디입니까? 내가 만나기를 꺼려하는 사마리아인과 같은 사람은 없습니까? 내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복음을 들고 가서 전한다면 그곳에도 하늘의 기쁨으로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결단하여 발걸음을 떼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고난이나 박해라는 방법을 통해서라도 우리를 사마리아로 보내실 것입니다. 그곳에 복음을 통해 기쁨이 충만하도록 말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들고 예수의 이름을 전할 때, 그곳에 하늘의 기쁨이 충만해질 것입니다. 사마리아 성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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