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음질하는 삶”(고린도전서 9장 24~27절)
오진석 목사(청주지방회장, 순복음성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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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5-07-14 09:42본문
교회 고등부 교사 때의 일입니다. 고등부 학생들과 체육 대회를 하게 되었는데 학생 대 교사들의 릴레이 경주를 했습니다. 제가 교사 마지막 주자로 뛰는데 여자교사, 남자교사 할 것 없이 앞선 주자들이 너무나 잘 뛰어서 저는 쉽게 이길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달리다가 문득 내가 교사가 되어서 학생들을 이긴다는 것이 뭔가 찜찜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내 마음속에서 이런 외침이 울려 퍼졌습니다. ‘지금까지 너가 달렸냐?’ 깜짝 놀라 ‘그렇지 지금까지 내가 뛴 것이 아니지’ 하며 뒤를 보니 반바퀴 뒤져있던 학생이 바짝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그걸 보고 나름 열심히 뛰어 간신히 승리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본문 24절의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는 말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까요?
믿음의 삶 아래서 하나님의 뜻과 목적대로 살면 모든 것이 잘 된다고 생각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을 얻기 위해서 열심히 달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만 생각합니다. 어떤 분은 일등을 놓쳐 본적이 없다고 집안에 상을 전시해 놓고 자랑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삶이 늘 그랬듯이 열심히 달리면 결승점에 도달했을 때 하나님께서 상을 주신다고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가만히 앉아서 천국만 바라보는 것을 게으른 신앙으로 타박하고 일어나서 천국을 향해 달음질 하라고도 말하며 전심전력을 다한 필사적인 달음질을 하라고까지 합니다.
빌 3:13-14절의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는 구절이 이러한 말을 편들어 주는 것 같은 구절도 있고 히 12:1절의 내용도 신앙생활을 경주, 즉 달음질하는 것으로 말합니다.
이러한 구절을 근거로 해서 우리는 달음질하는 신앙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씀에서 필히 따라오는 것은 경쟁입니다. 바울은 다 달릴지라도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 하니 달리는 사람들 틈에서 상을 받기 위해서는 남보다 더 빨리 달려야 하는 경쟁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천국을 향해 함께 달리면서도 이겨야 하는 관계가 되고 이러한 모습은 세상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습니다. 큰 교회가 되기 위해 열심히 경쟁을 합니다. 이런 경쟁으로 인해서 성도를 놓고 크고 작은 다틈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상 받기 위한 신앙생활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고전 8장에서 시작된 우상 제물을 먹는 문제가 10장까지 이어지는데 9장의 내용은 우상 제물을 먹고 먹지 않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표면적으로는 상 받는 신앙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우상 제물 문제를 통해서 성도의 자유와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실 경주에서 1등은 하나입니다. 은메달 100개와 금메달 1개와는 가치도 그렇고 세상은 2등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보면 상 받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는 것은 1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고, 따라서 1등이 되도록 달음질하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편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해석은 세상에 통용되는 원칙과 사고방식을 따른 것으로써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세계와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우리의 시각에서는 합리적인 해석 같지만 사실 믿음은 버리고 자신의 행함 즉, 문제에 충실한 해석일 것입니다.
바울은 25절에서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 말합니다.이기기를 다투는 자는 달음질을 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달음질을 하지 않는다면 이기기를 다툴 이유가 없으니까요. 이것을 연결해 보면 달음질하는 사람은 이기기 위해서 모든 일에 절제하게 된다는 뜻이 됩니다.
절제 하는 자들은 모든 일을 자기 뜻이나 마음대로 하지 않습니다. 이기기 위해서 좋아하는 모든 것을 참아야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경쟁 속에 있는 세상은 그렇게 절제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자기의 승리를 위한 절제이기에 얼마든지 절제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에게도 절제가 있었습니다. 자기의 권리를 다 쓰지 않는 것이 절제의 한 예인데 바울의 절제는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것을 얻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썩어질 육체의 승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영원히 썩지 않은 것에 참여되기 위한 절제를 말입니다.
이것이 26절에서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라고 말하는 것처럼 분명한 목표가 있는 달음질입니다. 썩지 아니할 것이 바울의 달음질하는 이유였고 목표였고 삶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길까요? 썩을 승리자의 관일까요, 썩지 아니할 것일까요? 당연히 우리의 마음은 아담과 같이 보암직도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썩을 승리자의 관으로 끌립니다. 왜냐하면 썩을 것이라 해도 그것이 잠시 잠깐 육체로 사는 동안 인생을 행복하게 해준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운동장에서 달음질하고 이기기를 다투며 절제 한다 해도 결국 그 목표는 나의 승리인 것입니다. 하나님도 아니고 예수님도 아닌 바로 나의 승리를 인생의 목표와 방향으로 삼고 달리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기독교인들에게 그 달음질의 끝은 하나님에게 버림받는 것이기 때문에 목표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느 기독교인이라도 하나님에게 버림받는 것을 목표로 달리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영원한 것이 목표라고 말하고 듣고 전하면서도 정작 썩어질 면류관을 얻고자 달리는 것이 우리의 삶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27절에서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바울이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지 않기 위해 복음을 전파한다기 보다는 복음을 전하는 목표가 자신이 버림받지 않기 위해서라면 바울의 복음은 자기를 위한 것이 되고 앞에서의 모든 말을 스스로 부인하는 결과가 될것입니다.
하나님께 버림당하는 것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위해 달렸을 때 일입니다. 즉 자기를 위해 달리는 것이고 자기를 위해 달린다는 것은 복음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께 버림받는 것이지만 하나님께 버림받지 않기 위해서 복음을 위해 살자는 뜻으로 이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기독교인에게 바울은 특별한 인물로 각인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할 때 바울은 사도 중의 사도라고 생각하고 다른 사도에 비해 복음을 많이 전하고 교회를 세운 업적이 뛰어나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바울의 구원은 당연하게 여기는 시각이 많습니다.
그러한 시각으로 자신을 본다면 어떨까요? 자신에게도 그리고 타인에게도 구원 받을 만한 세상적 지위와 명예 업적이나 행위, 열심이 있는가를 살필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보다 더 크고 좋은 상을 받고자 하는 마음으로 여러 일에 자신의 열심과 자신의 업적과 자신의 학벌과 자신의 교회를 동원해서 자랑 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기 위해 이기기를 다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했다는 것은 바울이 무엇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뜻일까요? 남에게 복음을 전파한 자기 행위, 업적, 족보. 학벌 등일 것입니다.
복음을 전파한 자신에게 초점을 두었다면‘나는 사도중에 사도로서 구원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자신의 어떠한 행위,업적, 족보, 학벌 등이 구원의 근거나 이유가 되지 못함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이‘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는 말에 담긴 바울의 심정일 것입니다.
바울의 말에서 드러난 것은 평소에 자기의 이김,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우리의 본색입니다. 이 본색이 우상 제물의 문제에서도 드러나게 되는데 만약 우상 제물의 문제로 다툰다면 그것은 자기의 이김을 위해서일 것입니다.
교회 내에서 성도들이나 교역자들이 다툰다면 그것은 목회자의 아픔이기도 하지만 지방회에서나 교단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것은 각자에게 있는 지식의 다툼일 것입니다. 회의 때마다 “법이요”하며 따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복음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생각하기보다 오히려 복음을 자기를 위해 이용하는 것이고 교회를 자기를 위해 운영하는 것이고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목표 없는 달음질을 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누구나 승리자가 되고 싶어 합니다. 일평생 태중에서부터 에서의 발을 붙잡고 태어난 야곱같이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거치며 경쟁 속에서 이겨야만 칭찬받는 세상에서 살다보니 지는 것은 상상하기도 싫어합니다. 그래서 자기의 지식을 거부하거나 자존심을 건드리면 신앙과 성경을 도구로 다투게 되고 자신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사람에게는 눈에는 눈으로 끝나지 않고 삼십배, 육십배, 백배로 보복을 하려고 합니다.
우리의 문제는 그러한 자신이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말하면서도 그것으로 자신의 신앙 자존심을 세우려고 한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무지고 둔함입니다.
이러한 인간성을 알기 때문에 27절을 ‘달음질하라’고 말하는 바울에게 신앙은 항상 자기 몸을 쳐 복종하게 하는 삶입니다. 성도는 예수 안에서 자기 것이 없는 자임에도 실제로는 더 많은 자기 것을 쌓아서 이기고 자존심을 세우는 일에 몰두합니다. 이러한 현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에게는 싸움으로 다가오고 이 싸움이 자기 몸을 쳐 복종하는 것이고 이들은 이미 상을 받은 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하는 달음질은 행위의 열심을 요구한다기 보다 자기 몸을 쳐 복종하게 하는 싸움이 있는 신앙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이 싸움에는 필히 참여됩니다.
이 싸움에서 이기는 것은 어떤 어려움에서도 복음을 전하고야 마는 방식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조용기 목사님이 늘 말씀하셨듯이 ‘내가 하는 일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웬일인지 웬 은혜인지 주님께서 사용하고 계시다는 것이 한 없이 감사하고 기쁜 것이고 이어서 이영훈 목사님의 절대 긍정, 절대 감사의 삶, 예수님이 하신 일만이 우리에게 구원이 됩니다’라는 고백이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구원이된 십자가 앞에서 내가 주를 위해서 한다고 했던 모든 것이 초라한 것임을 알게 되는 것이 자신의 몸을 쳐 그리스도께 복종되는 것이고 이것이 성령의 일하심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는 그렇게 예수님이 하신 일만이 구원이 되고 영광이 된다는 고백을 하는 것으로 한 분 성령 안에서 하나의 믿음의 공동체로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에 여럿이 뛰는 것이 아닌 하나인 것이고 결국 상을 받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사람이 다 달릴지라도 상을 받는 사람이 한 사람 예수라는 것은 달음질을 잘한 사람 각자에게 주어지는 상이 아니라는 뜻이고 자기 실력과 힘으로 달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지금까지 주님이 하신 일을 받아 누리는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상에 대한 지식이 있고 우상 제물을 거리낌이 없이 먹을 수 있다 해도 그것이 우상 제물을 먹지 않는 자에 대한 판단이나 자기 잘남으로 드러나지 않아야 되는 것입니다.
성도가 복음을 위해 달음질 한다면 그 자체로 매인 것이 없이 자유롭기에 달음질을 할 수 있습니다. 성도에게 영광은 그리스도 안에 부름 받은 것이고 이미 영광에 참여된 것이고 이것이 성도인 우리의 상이 되고 삶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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