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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멜렉과 그 가족의 모압 이주 (룻 1:1~5) >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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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멜렉과 그 가족의 모압 이주 (룻 1:1~5) > 설교




엘리멜렉과 그 가족의 모압 이주 (룻 1:1~5)

김영식 목사(전라제2지방회장, 곡성순복음장선교회, 총회 광주신학교 교수)

페이지 정보

작성일20-11-09 11:01

본문

김영식 목사(전라2).jpg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1절)

 

룻기의 시대는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인데 정확하게 어느 때인지는 잘 알 수가 없는데 입다와 입산이 활약하는 그런 시대였다고 성경학자들은 보고 있다.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들었다”고 룻기 1절은 기록하고 있다. 이런 것은 당시 시대를 우리가 알면 금방 이해할 수 있다. 사사들이 치리하던 종교 암흑 시대에 그 땅에 흉년이 들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징계에 속한다. 하나님이 택하신 이스라엘 민족들이 못된 행동을 반복하고 사사의 말도 잘 듣지 않자 흉년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흉년의 징계를 당하게 될 때 사람이 취할 자세를 우리가 배워야 되는데, 교회에서 잘 안 배우고 안 가르친다. 참 안타까운 일인데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그 하나님의 자녀들이 잘못된 길로 갈 때에 징계를 하신다. “받으시는 아들들마다 근실히 채찍질하시고 징계하신다”(히 12:6). 

 

사생자라면 몰라도 참 아들이라면 반드시 징계하신다. 성경은 그렇게 가르친다. “징계를 당할 때에 성도가 어떠한 자세를 가지고 그 징계에 임해야 하느냐?” 는 그 징계를 받아들이는 자세가 어떠 해야 하는가를 우리에게 가르친다. 

 

징계의 때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으로 간 내용이 나온다. 잘못 간 것이다. 하나님께서 징계하시면 맞아야 하고 그 뒤에 회개하면 되는데 베들레헴에 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흉년이라는 가벼운 징계를 가지고 때리니까 맞지 않겠다면서 모압 땅으로 도망을 간 것이다. 그래서 모압 지방에 가서 우거하였는데 2절에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라고 했다.

 

엘리멜렉이라는 말은 ‘하나님은 나의 왕이시다’이다. 엘리멜렉, 정말 사사시대에는 하나님이 우리의 왕인데. 사사시대에 아주 걸맞은 그런 이름을 지었다. 엘리멜렉의 아버지는 아마도 믿음도 있고 시대를 보는 안목도 있었던 사람이라고 보인다. 

 

그런데 어떻게 그 아들이 잘못되어 가지고 하나님께서 징계의 채찍을 들었을 때에 징계를 달게 받으려고 하지 않고 피해서 도망을 간 것이다.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이다. 나오미라는 이름은 ‘상냥하다 또는 달콤하다’라는 뜻이다. 고대인들은 자기 자녀들의 이름을 지을 때 그 당시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설명해 주는 이름을 선택하거나, 혹은 자신들의 소망이 담겨 있는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일례로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십보라에게서 얻은 자기의 아들에게 자신이 당시에 처해있던 상황을 말해주는 ‘내가 이방에서 객이 되었다’라는 뜻의 게르솜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또한 모세의 부모는 애굽의 억압에서 구원받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자기들의 아들에게 ‘건짐을 받은 자’라는 의미로 모세라는 이름을 붙였던 사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즉 어떤 사람의 이름이 그 사람의 인격 형성에 미치는 영향은 우리들이 보통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크다. 따라서 부모들은 자녀들의 이름을 지을 때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어린이들은 자신들의 이름과 같은 뜻의 이름을 가졌던 과거의 휼륭한 사람들을 본받아 그들의 덕성을 자기들의 덕성으로 삼기 위하여 최대한 노력할 것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그 이름에 합당한 인간이 되기 위해 노력하게 될 것이다.   

                                           

방황하는 엘리멜렉의 가족

 

롯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님을 떠나 방황하는 사람들에 대한 슬픈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엘리멜렉의 가족들은 왜 고향을 떠나 방랑하는 신세가 되었나?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1절)라는 말씀으로 충분할 것이다. 즉 그들은 자기들이 살던 땅에 흉년이 들어 양식이 부족해짐에 따라 보다 양식이 풍부한 곳을 향하여 정처 없이 방랑하게 되었던 것이다. 엘리멜렉의 가족들은 자기들이 살고 있는 땅에 일시적인 어려움이 닥쳐오자 그것을 피해 달아났는데, 그 어려움은 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이었다. 즉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시련을 피해 달아났던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섭리 가운데서 우리에게 시련을 주실 때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는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상황에 만족하고 그 시련을 달게 받아 이겨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의 채찍을 받아야만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치시는 책망의 채찍은 결코 채찍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징계를 달게 받아들이면 그것은 즉시 축복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엘리멜렉의 가족은 흉년이 들어 그 땅에서의 삶이 잠시 동안 어려워지게 되자 그 어려움을 주시는 하나님의 징계를 참아내지 못하여 그 땅을 버린 채 달아나고 말았다. 그들이 버리고 떠난 땅은 그 조상 때부터의 땅이었고 또한 주님의 땅이었다. 더욱이 그들의 친척들과 친구들은 그 땅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본문의 기록에 의하면 그들이 버리고 간 유다 베들레헴 땅에 몇 해 후에는 커다란 풍년이 들어 흉년 시에 받은 피해보다 더 많은 것으로 되돌려 받았던 것을 알 수 있다(6절).

 

 반면에 고향을 떠나 엘리멜렉의 가족이 머물렀던 모압 땅에는 흉년이 들었고 따라서 그들은 고향에서보다 극심한 고통에 처하게 되었다. 소크라테스는 감옥에 갇혔을 때 탈출을 권유하는 제자들을 향해 “사람이 죽지 않는 땅이 있으면 말해보게, 그런 곳이 있다면 당장 그 곳으로 도망가겠네”라고 말했다고 한다. 

 

정말 그렇다. 하나님의 징계를 피해서 숨을 수 있는 곳이 이 세상에는 없다. 만일 엘리멜렉의 가족이 달아나지 않고 하나님의 징계를 순순히 받아들였다면 그들의 상황은 얼마나 더 좋아졌을 것인가! 정말 엘리멜렉의 가족은 바보 같은 행동을 했던 것이다.

 

에덴동산의 온갖 아름다운 것들을 소유할 수 있도록 허락 받았던 아담이 단 한번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방황하는 신세가 되었다는 것을 기억하라. 우리는 모두 아담과 같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면 방황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자녀임을 깊이 인식하고 기꺼운 마음으로 그분께 순종할 때 무한한 행복을 경험할 수가 있다.

 

또 하나 우리가 본문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은 그들의 방황이 불만과 반항의 마음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본문을 교훈삼아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그 뜻에 기꺼이 순종해야만 하겠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시련은 당신의 지혜로우심에서 나오는 자비인 것이다.

                                       

영적인 번영을 구해야 한다. 

 

엘리멜렉의 가족이 유다 땅 베들레헴을 떠나서 모압 땅으로 이주한 것은 과연 현명한 처사였는가? 사실 그들은 몇 가지 점에서는 지혜로운 행동을 했다. 즉 모압 땅은 양식이 풍부하고 유다 땅에는 흉년이 들어 궁핍했기 때문에 양식이 풍부한 모압 지방으로 이주한 것은 현명한 행동이다.

 

그러나 그들은 순전히 세상적인 지혜와 판단에 따라 주거지를 옮겼다. 즉 엘리멜렉의 가족은 자기들이 유다 땅을 떠나게 되면 하나님의 축복권에서도 떠나게 된다는 점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던 것이다.

 

따라서 약속의 땅을 떠나서 우상 숭배가 성행하던 모압 지방으로 주거지를 옮긴 엘리멜렉의 행동은 세상적으로 보아서는 지혜로운 행동이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영적으로는 분명히 어리석고 잘못된 행동이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영적인 은사와 축복들을 가볍게 취급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다. 우리는 주거지를 옮기거나 새로운 환경으로 들어가려 할 때는 반드시 그 새로운 상황이 우리에게 영적으로 유익을 줄 것인지, 아니면 해를 끼칠 것인지에 대해 숙고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결코 세상적인 관점에서 결정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이 세상에서 물질적으로 점점 더 풍요로워진다 할지라도 영적으로 점점 더 시들어가게 된다면 이보다 더 슬픈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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